구원의 비밀
딱히 글의 제목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 구원의
비밀 ‘이라는 제목으로 정했다. 물론 이번 글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중에 당연히 포함되는 내용이기에 상관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내가 겪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명상
등을 통해서 깨달은 것들이다.
이해가 된다면 다행이고, 무슨말인지 몰라도 상관 없다.
실제로 주변 아는 지인들에게 이야기로 아무리 설명해 줘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니, 부족한 글솜씨로 설명하는데
오죽하겠는가.
오히려 각종 종교나 수행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못알아 듣는 희한한 경험만 했을 뿐이다.
반면에 어떤 종교든 수행이든 상당히 깊이있게 신 의 말씀과
진리에 근접해간 사람들일수록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알아듣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을 보태주는 경우도 있었다.
어짜피 진리는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도 해줄수도 없으나, 인연이
닿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글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족한 깨달음이나마 정리해서
글로 올리고자 한다.
지금 나의 상태는 이러하다.
싸움의 기술은 알고 있으나, 실전에 하나도 적용하지 못하고 매일
맞고 다니는 동네북이다.
축구의 기술은 잘 알고 있으나, 실전에 적용하지 못하고 매일
헛발질만 하는 사람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이론 에는 빠삭하지만, 실전에서는 먹통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것이 헛된 허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마음 속에서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허상을 쫓아 다니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나에게 남은 마지막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 마음 속에서 헛된 미련과 집착을 거두어내는 일 말이다.
말은 쉽지만 매번 실패만 거듭하고 있고, 점점 깊은 수렁속으로만
빠져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마음만 잠깐 각도만 틀어서 돌리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 않으니 문제다.
그러니 내가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 너는 그럼 그렇게
하느냐? ‘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리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누가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 정말 진리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이 이해가 안된다면,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진리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고?
실체는 놔두고 자꾸 허상만 바라보려 하는데, 어떻게 실체에
근접해 갈 수 있겠는가?
세상과 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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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제목은 거창하다.
세상과 우주의 비밀이라고 하니 대단히 뭔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새로울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닌 이미 오래전 수 천년
전에 알려진 사실중에 하나일 뿐이다.
성경을 보면 그 속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세상과 우주의 모든 것은 마귀에게 주어진 권세 아래에 놓여
있다라고….
심지어는 우리들 자신의 육신 조차 그 권세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뿐이다.
오로지 마귀의 권세에서 제외된 하나는 우리들의 영혼 뿐이다.
그렇기에 마귀는 자신의 권세 아래에 우리의 영혼을 종속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불경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허상이니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 안의 불성을 깨달아 해탈을 하라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성경은 왜 세상이 헛된 것인지 그 이유를 분명히 이야기 해주고
있고, 불경에서는 그냥 헛된 것이니 집착을 버리고 해탈 하라고
한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았는가?
그렇다면 한결 이야기 하기가 쉬울것 같다.
매트릭스 속의 세상에 현재의 우리 세상과 온 우주를 대입해 보라.
매트릭스 속의 세상이 바로 마귀의 귄세가 허락된 공간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너무 깊게 연관 짓지는 말라.
그냥 그 속에서 하나의 힌트와 영감만 얻으면 되는것이다.
이처럼 마귀는 세상의 헛된 것들로 우리들의 영혼을 자신의 권세
아래에 두려고 한다.
맛있는 음식, 부와 권력, 미남과 미녀 등을 제공해주었다가 때론
빼앗기도 한다.
이렇게 줬다 뺐었다 해야지 더욱더 집착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한번 맛본 달콤한 맛은 거부하기 힘든 법이다.
오죽하면 도가의 옛 이야기들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겠는가?
수행을 통해 신선 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여자 맛을 한번 보더니
신선 이 되는것을 포기하고 인간계에 눌러 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마치 매트릭스 속의 세상처럼 허상일 뿐이고, 이
모든 허상들은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진 그의 소유일 뿐인 것이다.
불가사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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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종교를 만들어 자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안의 불성을 깨달아 스스로 부처가 되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라.
스스로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없고, 부처상 앞에
엎드려 그를 숭배하고 절하고 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면은 가진 모든 재물을 버리고
따르라고 하셨다.
심지어는 부모, 형제도 버려두고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보라.
집에 재물을 쌓아두고, 내 부모, 내 형제만을 위해서 살려고
아둥바둥 한다.
이것은 성직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십자가를 만들고, 마리아상을
만들고 그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곳에 항상 계시고 동시에 존재하신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십자가를 만들어 그
앞에서 기도하고, 교회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지어 그 속에서
기도해야 되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렇게도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경고 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무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라고 하셨다.
성경을 백번 천번 읽어봐도 스스로 더듬어 찾아보지 않으면 결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수 없다.
마귀가 천사를 가장해서 드러낸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착각에 빠지는 일만 생길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오히려 더욱 재물과 권력에
집착을 보이는것 같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부모, 형제는 물론 재물까지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어찌된 판인지 전세계 부의 절대량을
유대인들이 잡고 있으며, 고액의 연봉을 받고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성직자들이 있고, 그를 따르는 신자들은 악덕 기업을
운영하면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갈취해서 번 돈으로 거액의 헌금을
교회에 납부한다.
어떤 성직자는 선물로 받은 것이라며 당당히 이야기하는데, 웃지
못할 일이다.
받았거든 어려운 이웃에게 몰래 나누어 주었어야 할게 아닌가?
그 무슨 핑계를 그리 댄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런 고액의 선물을 한 사람에게 말하길, 앞으로는
자신에게 선물할 것이 있다면 어려운 이웃에게 그만큼 베풀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게 아닌가?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렇게 하지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바로 마귀의 귄세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며,
이 세상에서 마귀가 뭔짓을 하던 마지막 심판 전까지는 하나님이
그의 손에 맡겨두셨기 때문이다.
스스로 구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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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게 복을 구한다.
하지만 정작 복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 신은 없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복을 줄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자는 세상의
그 어떤 전능자가 와도 그에게 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신 들은 이미 그들이 복을 구하는 순간
그들에게 복을 주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그 복을 차단하고 있기에
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복을 받을수 있게 자신을 만든다면 그 순간 즉시
자신의 앞에 와서 대기하고 있는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원하며, 그를 믿고 섬기고
있다.
그러나 구원받거나 받을수 있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이미 구원을
받았는지 받을수 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 구원은 이미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앞에 가서 항상
기다리고 있다.
그 구원은 여러분들 각자의 마음 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벽을 두텁고 높이 세워두고 있다.
그러니 구원이 그 사람에게 이르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리게 된다.
마귀가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먼저 자기가 구원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이처럼 그
사람을 구원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고 복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고, 복을 받을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도, 부처님도 여러분들을 처음부터 구원해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구원을 받고 못받고는 여러분 각자에게 최우선적으로 달려있다는
말이다.
여러분들이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지만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말인지 이해가 되는가?
나는 지인들에게 이 부분을 설명해 주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무조건 하나님만 믿고, 부처님께 매달리기만 하면 그분들이
구원해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나의 말은 신성 모독쯤으로
여기니 난감할 수 밖에…..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것 같은가?
자신안의 불성을 깨달아서 스스로 부처가 되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것 같은가?
위의 두가지 모두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들은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야지만 두 분의 말씀처럼 그
이후의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천국이나 극락에 간다고?
웃기지 말라.
그 소리는 마귀가 여러분들을 방심하게 해서 영원히 그의 권세
아래에 두고 종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달콤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불과하다.
천국과 극락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쉽다면 성경책이 왜 그토록
방대한 분량이 되어야 하며, 불경이 왜 그토록 방대한 분량이
되어야 하는가?
마귀의 농간에 놀아나지 말고, 그 속에서 진리를 더듬어 찾아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바로 알고 찾아 보라는 말일 것이다.
생명으로 이르는 문을 좁고,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건 안믿건, 부처님을 믿건 안믿건 그 분들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려면 먼저 그 분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난 다음에 이야기 하는 것일 옳은 순서일 것이다.
성직자들이야 개판을 치든 소판을 치든 그것과 하나님 혹은
부처님과는 무관한 일인 것이다.
마귀의 자식들이 하나님 혹은 부처님께 속한 사람인것처럼
가장해서 깽판을 부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 혹은 부처님을 나쁘나고
말할 수는 없는것이 아닌가?
시련을 견뎌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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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
이미 여러분이 믿는 신 께서는 여러분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다만, 그 길이 여러분의 바로 앞에서 단절되어 버렸다는게
문제이다.
그 단절은 여러분 스스로가 시킨 것이지 그 누구도 아닌다.
신 께서는 여러분들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 단절된 길을 다시 잇는 것은 다름 아닌 여러분 각자의 몫인
것이다.
이제 좀 이해가 되는가?
만약, 내 말을 이해하고 신 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서 굳게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 벽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면, 그 이후부터 여러분들에게는 시련이 닥치게 될것이다.
마귀가 그러지 못하도록 결사적으로 막으려 들테니깐 말이다.
육체적인 고통, 정신 적인 고통이 당신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당신을 공격해 올 것이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배신 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고, 사랑하던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등등….
그 시련은 당신의 약점만 교묘히 파고 들기에 정말로 견디기
힘들다.
신 께 구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도 없다.
마지막 때의 시험에 이르면 그 시험을 견뎌내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
신 은 심판의 방관자로서 구경만 할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의 믿음과 의지로 버티고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모두가 당신의
핍박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끝까지 마지막까지 참고 견뎌내는 자라야 결국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이고, 벽을 허물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간혹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벽을 두텁고 높이 세워두고도
그 스스로가 자신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고, 벽도 다 허물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그 착각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이 사람들은 마귀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구원을 받을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왜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그 스스로가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벽을 허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벽을 허무는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게
아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해보아도 번번히 닥치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까지 추락하는 뼈저린 경험만 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다.
매번 그러하다.
자포자기 하고 그냥 세상에 속해 살려고 하면 이상스럽게
잠잠하다가 마음의 문을 열고, 벽을 허물려고만 하면 여지없이
나에게 결정타를 먹여서 와르르 무너지게 만들고 있다.
나의 약점만 딱 골라서 말이다.
매번 도전하고 매번 실패로 끝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 벽을 허무는 것에 도전하고 있다.
나는 이미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 벽을 허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내 마음속의 결정이 문제이다.
세상 모든 것이 헛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그 허상이라도 잡아 보고 싶다는 집착과 미련이
나를 문 앞에게 망설이게 하고 있다.
문에 손을 갖다대고 열기만 하면 되는데, 매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가 당하게 된다.
나는 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의 시련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보다
차라리 죽은자가 더 복이 있다고 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석가모니 역시 마지막 유혹을 이겨내고 부처가 되었고, 예수님
역시 마귀의 마지막 시험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기셨다고 선포하셨
듯이 마지막 심판의 때가 이르면 시련이 닥치리니, 그 시련을
믿음으로 참고 견뎌내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수 있게 될 것이다.
앞의 이야기들은 자신의 내적인 구원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지만
마지막 말은, 외적인 구원의 과정이 될것이다.
내적으로 일어나던 것들이 외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견뎌낼 자신이 있는가? 솔직히 말해 나는 자신 없다.